▲ 서해성 작가

[역사의 용광로 앞에서]
-비상시국토론회(11월2일) 발제요지

역사의 용광로에서 쇳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쇳물의 이름은 민주주의다. 용광로 밑에서는 낡은 권력이 제 아버지의 넋대를 붙잡은 채 바야흐로 하강을 예비하고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몇몇 세력은 붕어빵 틀을 들고 밀가루 반죽이 쏟아지길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대개 고양된 대중의 열기를 굴절시키고 빨아들여서 자기 권력으로 치환하는 자들이기 십상이다. 이들이 주로 들먹거리는 건 제도와 절차다. 이는 얼핏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기존 체제의 틀을 유지한 채 권력을 다시 자신들이 틀어쥐는 방향으로 유도해갈 게 거의 틀림없다.
 

“역사의 새 국면, 핵심은 주권 재민”

역사의 새 국면이 열리고 있는 이 엄중한 상황에서 가장 핵심은 주권 재민이지 절차는 도리어 부차적이다. 절차와 제도 자체가 애초부터 ‘재민’을 이뤄내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 ‘재민’을 새삼 확인하고, 나아가 확장해가는 일이 오늘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다. 야당을 포함해서 제도정치라고 부르는 기성정치세력에게 의존할수록 ‘재민’이 지닌 근대국가를 열어젖힌 이 혁명적 가치는 빠르게 소멸해갈 수밖에 없다. 단언컨대 절차에 갇혀 현 사태를 평시처럼 말하는 상황인식 자체가 중대한 오류다. 제도와 절차라는 기성권력 관리 시스템에 매몰되어서는 시민 승리를 완성태로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수구세력은 이미 권력 재구성에 들어갔고 보수연립내각 수준의 거국(중립)내각 따위를 기도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건 형식적 요건으로는 부당해 뵈지 않지만 그들은 정작 이 국난의 공범자들이다. 이들이 상황을 주도한다는 건 집을 불태워버린 자가 새 집에 먼저 들어가 살겠다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이번 주술국가 사태가 아니라도 이들은 지난 9년 동안 민주국가 이념과 기본권을 압살해온 자들이다. 새 권력 논의에서 이들 중 핵심은 사전에 제거되어야만 한다. 야당은 갑자기 닥쳐온 손에 잡힐 듯한 집권환상에 침흘릴 게 아니라 우선 이 역할에 일차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9년 굶은 그들의 표정이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문제는 현재 이들은 비선출 통치권력이었던 주술사를 집권세력이 보호해주고 있는 것조차 제압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이 주체냐에 따라 역사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수구언론까지 읊조리고 있는 하야도, 퇴진도, 탄핵도 시민의 힘에 의한 것이냐, 보수의 기획과 주도에 의한 것이냐에 따라 역사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새 국면의 상황을 누가 주도하냐는 미래 주도와 직결된다.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가는 자칫 다시 유사 6.29선언을 당하는 걸 면할 길이 없다. 그렇게 되면 설령 개헌을 하더라도 그 수준이나 권력 창출에서 또 한 번 수구들에게 역사와 정의를 강탈당할 게 틀림없다. 그날 이후 회자되고 있는 상당수 논리들은 확언하지만 주술국가를 야기한 현 정권의 실정에 따른 반사적 언행일 뿐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주체 형성이 빠져 있다. 주체 없이 오는 게 어떻게 새 역사이겠는가. 그건 미래가 아니라 늙은 오늘일 뿐이다. 제도가 새것이라고 해도 주체의 빈곤은 그 내용을 담아내지 못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
 

지금 필요한 것은 시민의 승리 체험이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광장을 실질적으로 떠난 대중은 승리에 대한 기억조차 까마득한 형편이다. 요컨대 대중 저항으로 현 권력을 붕괴시키고 무너뜨려야 한다. 승리체험이야말로 헌법을 포함한 모든 절차와 제도의 동력이자 내용물이다. 어떤 경우에도 제도 자체가 현장의 승리는 물론 종국적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먼저 시민 주도로 뜨거운 파국이 닥쳐와야만 한다. 현행 헌법만 하더라도 시민항쟁의 힘으로 탄생한 것이지 5공 헌법 아래 항쟁이 탄생한 게 결코 아니지 않은가. 서슴없이 말하건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야당이 진보적 상황을 창출한 적은 없다. 4.19와 6월시민항쟁을 보라. 죽 쒀서 개 줄까 봐 지레 걱정들 하는데 우선 승리해야 그 또한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공학적 접근을 앞세우는 자세는 끝내는 권력에 포섭될 위험이 농후하다.
 

“지금 필요한 건 저항의 기획과 방향.. 주권자가 나서야”

지금 필요한 건 저항의 기획과 방향, 여기에 따른 1. 특검(대통령 수사)-통치권 식물화-하야-과도내각 수립(주술국가 사태와 관련한 포괄적 책임이 있는 자는 배제, 시민참여) 2. 개헌(통치권 민주화, 표현의 자유와 복지확대를 포함한 기본권 확대, 비례성 강화, 지자체 독립성 강화, 검찰경찰 책임자 선출 등 제도 담보) 3. 대선 4. 법률의 민주적 개정 등으로 이어지는 로드맵 형성과 대중화 등 정치 어젠다 장악과 진행이다. 조기 또는 내년 12월 대선을 통해 뽑힌 대통령이 현행 헌법제체의 권한을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할 수밖에 없는 이상 개헌은 당연히 선행되어야 한다. 시민의 폭 넓은 활동이 개헌운동까지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구상과 실행과 실현은 시민저항과 상상력 넘치는 동적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주술에서 이성으로, 또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주술이 가능했던 통치권에 대한 해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단적으로 현행 대통령제는 파쇼통치와 바보통치가 용인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30년을 맞는 87년 체제는 수구의 내부 위기 자초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커졌지만, 대중이 뿜어내고 있는 이 뜨거운 액체를 고체로 간주하는 태도로 이어진다면 새 형태와 내용을 창조해내기는 못내 어렵다. 거듭 명심해두어야 할 것은 현재 상황이 시민 주체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집권권력의 자기 분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주권자가 나서서 진짜 할 일은 지금부터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민주사회에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참여하는 것만이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다. 어쨌든 대중 상상이 개입하지 않던 고형물의 대선판이 새로운 국면을 열어젖히고 있는 것만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저항 없이 정의는 도래하지 않는다”

‘그날’ 이후 수구의 태도는 급변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한편 여당 대선후보 부재도 한 몫하고 있다. 역사상 보수집권세력후보가 대선에 나가서 이길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희박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저들은 보수연합 대선이든, 내각제라는 장기 의회독재든, 개헌 따위로 다시금 이 과정과 정국을 주도하면서 정계개편을 포함한 새판짜기를 기획하고 있다. 이 상황을 야당이 장악하고 이끌어갈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보이질 않는다. 적어도 현재 이들은 탄핵역풍 운운하면서 저마다 셈법에 골몰할 뿐 대중의 상실감을 위로할 줄도, 역사의 새 국면을 열어갈 생동감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이런 태세로는 어떤 절차도, 제도도 허울 뿐 종국적으로 힘을 얻지 못한다. 저항 없이 정의는 도래하지 않는다.
 

이를 극복하고 상황을 이끌어나갈 시민참여를 보장하는 주권자 플랫폼, 이를 구조화시키는 시민(주권자) 권력 인수위원회 준비위원회, 이것의 발전적 형태로 시민개헌추진운동본부라고 할 만한 동적 조직 건설이 반드시, 또 시급히 필요하다. 시민이 강자라는 걸 스스로에게, 또 여야를 포함한 권력에게 확인시켜내지 못하면 시민 동력도 떨어져나갈 것이고, 기성정치권력들은 상황을 완충시킨 뒤 앞으로 형성될 공백을 훔쳐갈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우선 시민의 힘으로 권력을 해체하고 더 큰 용광로를 건설해야 한다. 용광로에서 붕어빵을 얻어낼 수야 없지 않은가. 나머지는 이 과정과 기초 위에서만 생생한 현재성을 갖을 수 있다. 현재를 모두의 것이게 하자. 새로운 주체 없이 새로운 세상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이 자리가 용광로에서 첫 쇳물을 퍼내는 작업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 땅에서 지식분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새삼 뼈저리게 생각한다. 저주 받은 내 땅을 인간의 대지로 바꾸고 싶을 따름이다. 이것이 불패의 길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나의 붓이 칼을 품지 못했을까 봐 오직 그것만이 걱정일 뿐이다. 상처도 분노도 없이 어떻게 조국을 사랑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