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최강욱 이사의 ‘속기록’ 작성 요청서 전문

충격이 컸습니다. 많이 화가 났습니다. 제 눈을 피함 멋쩍은 표정으로 회의장을 떠나는 모습에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분에게 남은 양심의 한 자락을 본 것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너무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애써 벌일 아닌 것처럼 피하려 해도 결코 떳떳하지 못한 일이란 건, 여러 분 스스로도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방문진 이사회가 협의체로서의 성격을 가진다면, 원칙에 입각한 최소한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군가의 조종을 받거나 지시를 받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면 너무나 자존심이 상한다고 단호히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차라리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속기록 작성을 반대하고 회의록에 이름이 기재되는 것을 극구 회피하는 것이라면 제 맘은 더 편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거역하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랬을 것라 위안을 삼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면, 아니 그런게 아니기에 더욱 참담하고 막막합니다. 원칙과 상식에 따라 합리적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약속은 어디에서도 그 결과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단 두 가지 사항, 매월 첫째 셋째 목요일 오후 두시에 정기이사회를 개최한다는 것 외에 서로 의견과 마음을 모아 결정한 사항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회의공개의 원칙이 명문화된 법률에 따라 최소한 회의록에 발언자와 발언내용이 바르게 정리되고 기록되는 것은 정치적 견해와 정파적 이해관계와 무관한 것이기에 손쉽게 합의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냥 보기에도 이상한 방문진의 영문 표기법 또한 해당 언어의 용례와 문법에 맞게 당연히 더 나은 모습으로 변경되고 합의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결과는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고, 혼자서 순진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입법조사처의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도, 방문진 이사로서의 짧은 경험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이사회 회의를 공개하라는 의미는 물리적으로 이사회의 회의 자체를 공개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울러 회의 내용을 다양한 방식으로 공개하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하물며 한국방송과 교육방송의 이사 발언은 속기록과 회의록에 남아 모두 기록되고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데도, 유독 방문진만 그렇게 하지 못해야 할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지난 9기부터 숱한 궤변과 비논리가 있었습니다. 영업비밀이 많아서, 광고수익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심지어 법에서 의무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말까지, 아니 그저 확실한 이유와 논리를 댈 순 없지만 그저 내 생각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까지 들었습니다. 단 하나라도 외부에 나가 우린 이러이러한 차이가 있기에, 저기서 속기사가 작성하는 속기록은 없는 걸로 하고 회의록에도 발언한 이사의 이름을 적지 않기로 했다고 당당하게 설명할 논거는 되지 못합니다. 하물며 언론의 왜곡보도와 정파적 분탕질이 우려된다는 말씀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 일을 방지하려해도 더욱 정확한 기록이 필요한 것일 테고, 그럼에도 부구하고 왜곡보도나 편파보도가 이뤄진다면 과연 그게 불량한 언론 탓입니까, 투명한 회의공개와 꼼꼼한 기록 탓입니까?

훗날 우리 자손들이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공영방송 이사로 무슨 일을 했냐고 물었을 때, 그리고 어느 날 장성한 자손들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한민국 공영방송의 위상 정립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확인하고 싶을 때에도 그것이 불가능하도록, 어엿한 이사들이 복면을 쓰고 회의록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저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회의록에서조차 숨겨진다는 사실을 도저히 자식들에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공개를 피하는 것은, 기록을 꺼리는 것은 부끄러움 두려움 창피함 쑥스러움이 머릿 속을 강력히 지배할 때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밖으로 나가시는 도저히 안 될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것이 있을 때입니다. 대체 방문진에서, 이사로서 발언하는 것에 어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국가기밀이 있기에 무슨 재난을 우려하는 것입니까?

이상하게도 회의 공개를 가급적 꺼리고, 기록조차 최소화하려는 마음을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방문진은 엄연히 공영방송인 문화방송의 관리 감독기관입니다. 국민을 대신하여 위임받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곳입니다. 뭐 해 달라면 들어보고 대충 동의하고, 때 되면 해외 출장 다니고, 어디 가서 영향력 발휘하며 나대는 지위가 전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일부에서 그토록 싫어하는, 좌경화 되었다는 노조를 진압하고 애국방송을 만들었을 때라도 증거가 필요할 것입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억지와 궤변으로 준동하는 좌익세력이 이사회에 침투해 있다면 그 증거를 위해서라도 기록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복면을 벗고자 합니다. 제 발언과 행동을 기록하고 당당히 책임지려 합니다. 역사의 교훈 때문이고 법률의 명령 때문입니다. 감추고 싶은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어려움은 피할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제 이름을 제 발언과 함께 기록하십시오. 그걸 막을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래서 과연 여러분이 우려하는 사태가 벌어지는지 직접 확인하십시오. 그래서 별다른 사고가 없다면, 재난 결정을 용기있고 당당하게 번복하십시오. 적극적으로 논의하십시오.

없어질 것은 편법이요, 돌아온 것은 정도입니다. 바른 길을 갑시다. 떳떳하게 갑시다. 그래서 가능하면 함게 기대어 쉬고, 지칠 때 함께 물을 나눠 마시며 제대로 된 공영방송이라는 목적지에 이릅시다. 누가 끼어들어 뭐라고 간섭하겠습니까? 함께 당당히 막아내고 지켜내십시다. 이토록 당연한 일조차 수를 앞세워 표결에 붙인다면, 그래서 그저 힘으로 짓누른다면 대체 방문진의 역사엔 무엇이 남을까요. 3년 내내 우린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요?

히틀러는 쿠데타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찌의 무한한 권력도 다수결에서 나왔고, 그 패망의 씨앗도 무모하게 휘두르기만 했던 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건전한 토론, 소수에 대한 존중, 합리적 결정을 통해 꽃피는 것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토록 당연한 일을 사정하고 호소해야만 합니까? 이 호소도 표결에 붙이시겠습니까?

2015. 12. 22
이사 최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