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어떤 사람이 동시에 이곳에도 저곳에도 있을 수 있다면 내가 왜 당신과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묻던 팝송 가사가 있었다. 만일(If)이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다.

만일이라도, 만에 하나라도, 어떤 사람이 동시에 두 곳에 머물 수는 없다. 인간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두 가지 정체성으로 ‘한’ 곳에 있을 수는 있다. 때로는 한 사람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동시성’ 혹은 ‘중첩’이 생겨나기도 한다. 딱 한 가지 상황에서만 그렇다.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이 자기를 이끌도록 거기에 온통 자신을 내맡길 때. 그럴 때 인간은 겹겹의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유영하는 스스로를,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듯 내버려두게 되는 건 아닐까.

2015년 20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시네마’ 야외상영작으로 영화 <사랑의 법정(L'hermine, Courted, 2015)>을 보았다. 폐막식 전날 영화의 전당에서 보는 마지막 야외상영이었다. 이 또한 우연과 행운이 겹친 덕에 보게 됐는데, 5천여석의 야외극장은 꽉 찼고 축제의 밤다운 낭만이 감도는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8시가 되어서야 이 상영이 얼마나 중요한 ‘공식행사’인지 알았다. ‘프랑스의 밤’ 행사를 위해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방한해 몸소 이 자리에 참석한 것도 그제야 알았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로 입양됐다는 사실로 유명한 펠르랭 장관은, 야외무대에서 직접 보니 정말 이름 플뢰르(Fleur, 꽃)처럼 기품 있고 아름다웠다.

▲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문화통신부 장관 <사진제공=문화체육관광부>

펠르랭 장관은 우선 이 넓은 극장을 꽉 채워준 부산 시민들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적인 위상의 영화제로 자리 매김 된 부산국제영화제의 주역임을 축하했다. 20번째 생일에 대한 감회에 젖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사랑의 법정>같은 프랑스 영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을 부탁하기도 했다. 우아하고 상냥한 펠르랭 장관을, 관객으로 앉아 있던 ‘시민’들과 이용관-강수연 두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영화인들만 마치 ‘비공식행사’처럼 보고 말았다는 게 퍽 안타깝기까지 했던 자리였다.

그렇게 정중한 인사와 함께 소개된 <사랑의 법정>은 일단 ‘코미디’로 분류돼 있다. 초반에는 법정 영화 같지만, 다 끝난 후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인생의 아이러니와 반전의 기쁨으로 인해 그 어떤 작품 보다 재밌는 ‘희극’이긴 하다. ‘중죄법원장’인 판사 라신(파브리스 루치니)이 주인공인데, 별명이 ‘두 자리 수’다. 형량이 최소 10년이기 때문이다. 변호인과 피고인들에게는 최고의 기피대상이다. 그도 잘 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얼마나 떨떠름하게 여기는지. 주변머리라고는 없는 이로 살아온 지 오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공식 설명을 옮겨 보겠다. “프랑스 성격파 배우 파브리스 루치니의 열연이 빛나는 프랑스식 법정 드라마. 자비에 라신은 범죄에 엄격하기로 평판이 자자한 판사이다. 그의 인생은 한 살인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배심원인 디테 로렌센-코트레를 만나면서 극적으로 변한다. 그녀는 과거에 그가 몰래 사랑했던 여자로, 다시 등장한 그녀는 그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버린다.”

▲ 영화 <사랑의 법정> 스틸컷

제목만 보면 이 영화는, 법정에서 연애하는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다. 초반에는 법정에서 ‘일’만 열심히 하는 고지식한 장면들이 재현되긴 한다. 하지만 다 보고 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법정에서 사랑하는 얘기 그 자체인 영화다. 내가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그 한 사람의 시선만으로 충분한, 이 고도의 농밀함. 어떻게 한 사람이 잠깐 사이에 돌 같은 ‘심판관’에서 낭만적인 ‘연인’으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놀라운 ‘전환’을 볼 수 있다. 바로 살인사건 재판 법정에서 말이다.

▲ 영화 <사랑의 법정> 스틸컷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사랑하면 방법이 생긴다. 옷 입을 줄 몰라 늘 빨간 목도리만 매고 다니는 이 센스 없는 초로의 남자가, 돌연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딴판으로 변하고 말았을 때 관객은 어리둥절하다. 5천여 관객이 한꺼번에 주인공 라신의 얼굴을 보고 있음에도, 그가 스크린에서 마술처럼 변신하는 순간은 미처 잡아채지 못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뭔가가 ‘영원히 바뀌어’ 버렸음에 대해서는 동의하게 된다.

6년이라는 시간은 분명 많은 것을 바꿔놓기도 했을 것이다. 둘의 처지나 ‘같이 사는 사람’ 여부에도 변화가 생기긴 했다. 또 생각 자체가 유연하고 자유로워졌다. 있고 싶은 곳에 머물 줄도 알게 되었다. 이를 테면 법정이 열리는 그 시간 그 공간은 이제 라신에게 온전한 자기 것이 됐다. 잠시일지라도 영원과도 같은 충만함이다.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새로운 힘이 그를 되살려 놓았다. 어쩌면 반평생을 그저 일터로만 여겨온 그 지루한 공간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담아 멋지게 날개를 펴는 공간이 되었다. 그 여인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이다. 설명할 순 없으나 분명 일어나버린 질적 변화. 더할 나위 없이 밋밋하게 등장해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한 남자, 라신.

▲ 영화 <사랑의 법정> 스틸컷

라신은 꿈꾸는 눈동자로 디테에게 말한다. “인생의 완벽함을 느끼게 해주는 건 당신 얼굴이에요. 그때... 회복실에서 당신 얼굴을 봤을 때 ‘이것이 인생이구나’ 했어요.” 의사인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몰핀을 맞으셨으니까.”

7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2015) 남우주연상을 받은 연기력에 완전히 반하게 되는 장면이다. 그는 무엇에 건드려진 것일까. 어떤 바람이 그와 그녀를 움직이게 했을까. “당신의 손잡는 방식은 사람을 미치게 해. 난 그 시간만 기다렸어요.”라는 한숨 같고 탄식 같으나 열에 들뜬 라신의 고백은, 디테의 손길이 등장하는 후반 장면에서 확인된다. 그 손이 얼마나 포근하고 따뜻할지를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그 손이 내내 마음에 남아 어루만져주는 느낌이다. 함께 영화를 보고 일어선 관객들이 힘껏 박수를 치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영화제 영화답지 않고(?) 따뜻하고 재밌었다고. 우리 동네 극장에서도 어느 날 곧 <사랑의 법정>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손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기를, 은은하게 빛나던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그 미소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