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베테랑’일까. 사전적 뜻풀이는 이렇다. 한 분야의 일을 오랫동안 하여 그 일에 관한 지식이나 기능이 뛰어난 사람. 그 일이 ‘어떤’ 분야이건 간에 관록이 쌓이면 해당된다는 말일까.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에 방점이 찍힌 단어 같다. 설령 공동선이나 사회적 합의를 저해하는 일이라도 ‘기술’이나 ‘기능’에 따른 ‘베테랑’ 혹은 ‘꾼’들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쩐지 이 단어에 윤리적 판단은 들어있지 않은 듯하다. 일 잘하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많다. 그 일을 성사시켜야 하는 나름의 정당성과 타당성도 꼼꼼히 마련돼 있을 것이다. 의문이 든다. 자타공인 베테랑 소리를 듣는 사람은, 일을 할 때 무엇에 의지해 움직일까. ‘감’은 오는데 도무지 꼬리도 몸통도 잡을 길 없는 암담함 앞에서 베테랑은 언제 추진하고 언제 멈출까.

영화 <베테랑>은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베테랑들이 각자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벌어질 한 극단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리얼’하게 보이는 이유다. 한편 이 영화는 대단히 극단적인 지점까지 인물과 사건을 몰아갔다. 극적 재미와 함께 ‘호쾌한 액션’에도 크게 신경 썼다. 극단적 인물들이 치열하게 맞붙으며 성질대로 ‘똘끼’를 부린 덕에 결말은 일종의 판타지처럼 됐다. 가장 강한 자가 제 꾀에 걸려 자폭하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현실에는 대개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경우는 별로 없는 법이다. 강자들과 가진 자들이 이익 앞에서 보여주는 자제력과 인내심이야말로 사실 서민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 영화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어쨌든 영화 <베테랑>은 여름 극장가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아무도 크게 기대하지 않던 개봉 초에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돌며 쉽게 500만을 넘어섰고, 개봉 25일 째 1000만을 돌파했다. 놀라운 기세다. ‘베테랑들이 만든 영화’라는 카피처럼, 정말 잘 만들어진 ‘꾼’들의 조합이긴 했다. 어쨌든 이런 흥행 성적은 현재 대중의 어떤 바람을 정확히 꿰뚫었기 때문일 것이다. 능청스러울 정도로 극 속에 잘 녹아든 사람들과 사건들도 볼 만 했고, 조연이든 단역이든 배우들 모두가 하도 자연스러워 딱 적역이란 느낌이었다. 완벽하게 릴렉스 된 채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인간들을 보는 게 굉장히 신선했다.

좀 풀어 설명하자면, 어떤 ‘무방비’ 속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처음’ 치러내는 인간의 그야말로 우왕좌왕하는 ‘초기대응’이 그럴 듯하게 (난리법석으로)펼쳐진다. 참사 보도조차도 마치 사전에 큐시트 같은 게 있는 듯 매끈하고, 사전에 ‘합’이라도 맞추고 동선을 ‘짠’ 것처럼 질서정연함이 대세가 된 뉴스들에 하도 질려서일까.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이 새삼 눈길을 끌었다. 마치 새로운 발견처럼 말이다. 인간은 낯선 상황에서 저렇게 허둥대고 갈팡질팡하기 마련이라는 당연한 생각이 무슨 깨달음처럼 찾아들었달까.

▲ <이미지출처=영화 '베테랑' 메인 예고편 캡처>

어쨌든 이 영화의 제목을 관객의 귀에 남게 만든 이는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 분)다. 광역수사대 베테랑 형사인 서도철(황정민 분)에게 “베테랑이시네”라는 대사를 날려준 이가 그다. 온갖 일류 일꾼들 위에 황태자처럼 군림하되 스스로는 판단도 잘 못하는 미숙한 재벌3세는 일단 ‘베테랑’이 못 된다. 그럴 필요도 없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조태오의 할 말은 그저 “나한테 이러고도 뒷감당 할 수 있겠어요?”라는 한 마디뿐이다. 그렇다. 무서운 것은 ‘뒤’다. 그가 아니다.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라고 말하는 최상무(유해진 분) 같은 베테랑들을 수족으로 두는 재력, 그런 게 무서운 것이다.

▲ <이미지출처=영화 '베테랑' 메인 예고편 캡처>

영화 <베테랑>에서는 세 종류의 인간형을 볼 수 있다. 분노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 수시로 분노가 치밀지만 결정적일 때는 참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전혀 조금도 분노 조절이 안 될 뿐 아니라 조절할 필요가 없는 절대강자. 이 세 유형 중 자제력이 가장 강한 이들은 ‘약자’들이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자신이 약자임을 분명히 아는 자는 밥줄을 지키려는 혼신의 힘으로 버틴다. 분노는 사실상 사회적 신분과 잇닿아 있었다. 영화 <베테랑>은 그것을 확연히 보여준다.

▲ <이미지출처=영화 '베테랑' 메인 예고편 캡처>

그런 점에서도 조태오 캐릭터는 흥미롭다. 온갖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순정파 실장님’들이 (절대)보여주지 않는 재벌의 (진짜)모습을 극중 조태오는 낱낱이 드러낸다. 그의 비열하고 잔인하고 폭력에 찌든 모습이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일 소지도 물론 있다. 저렇게 못된 점만 골라놓은 인물이 어디 있겠느냐는 반발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서두 자막에서 나오듯, 이 영화의 캐릭터와 사건들은 수많은 현실의 것들을 영화적으로 조합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현실과 똑같지는 절대 않다. 다만 현실에 있었던 ‘조각’들을 이리저리 따오기는 했다. 재벌3세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그와 똑같은 사람은 현실에 없다. 그러나 극중 그가 했던 행동들을 한두 가지씩 보여주며 뉴스를 장식한 현실 속의 재벌들은 많았다. 조태오의 어떤 행동도 사실은 놀랍게도 ‘상상력’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팩트다. 관객이 전율을 느끼는 점이기도 하다.

실상 TV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백마 탄 왕자님인 ‘실장님’은 현실에 비슷한 점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상상 100%로 만들어낸 순정과 의리와 다정함의 결정체다. 이런 솜사탕 같은 허구의 인물을 하도 보아서, 드라마 속 왕자님은 별 거부감 없이 잘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우리의 씁쓸하고 기이한 ‘관대함’이다.

<베테랑>속에서 재벌가 패밀리들은 ‘관행’대로 움직인다. 늘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 왔고 그게 통했다. 그러다 보니 극단까지 간 것이다. 제동이 한 번도 걸려보지 않은 폭주하는 욕망이었다. 물론 현실의 재벌들은,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일을 그렇게 크게 키운 것은, 조태오가 그야말로 영화 속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인물들은 절충을 한다. 혹은 밖으로 새지 않게 통제를 한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나쁜 놈으로 몰려 감옥에 가는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죄수복 입은 모습을 포함해 중형은 거의 기대할 수도 없고 수시로 (파격적인)특사도 따른다. 속이 시원했던 영화의 결말이야말로, 현재로서는 스크린이라는 허구와 가공의 조건에서만 볼 수 있는 대리만족일 것이다. 관객들도 눈치 하나는 베테랑일 테니, 그저 마음껏 웃어주는 것으로 서로 이심전심 아닐까.